작가 약력
정재호 Jae Ho Jung (b. 1971)
정재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한국 현대사의 잔재로 남아 있는 건물들의 표면에 스며든 개인과 집단의 ‘삶의 체취’를 포착해 한지와 캔버스에 사실적인 그림으로 기록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금호미술관, 갤러리현대, 상업화랑, 초이앤초이갤러리 등에서 총 13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아르코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쾰른, 베를린, 요르단 등에서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8년 올해의 작가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서울대학교미술관, 금호미술관, OCI미술관 등 주요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세종대학교 회화과 한국화 교수로 재직 중이다.
ㅡ 작업노트
십여 년 전에 구한 오래된 라디오는 지금까지 세 번 그렸고 이번에 두 번 더 그렸다. 두 점의 그림 중 한 점은 라디오의 정면을, 다른 한 점은 뒷면의 덮개를 열어 내부가 보이게 그렸다. 사진을 보지 않고 직접 보고 그릴 때 라디오라는 사물은 눈앞에 현존하는 더욱 확고한 물체가 된다. 그 확고함은 그 사물을 다르게 번안할 수 없게 만들었고 사물을 둘러싼 맥락이나 회화를 둘러싼 맥락이 개입할 여지없이 어떻게 하면 그려낼 수 있을까 라는 단순한 재현의 차원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긴 과정은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 사물을 겪어내는 것에 가깝게 되었다. 이를테면 오래된 부속들 - 나무, 플라스틱, 금속으로 만들어진 표면과 구조를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일은 오래된 라디오라는 물질적 차원 – 오래됨, 낡음, 부식, 탈각 –을 겪는 체험이다.
라디오의 뒷면을 그리는 일은 좀 더 복잡한 표면을 훑어 나가는 일이었다. 라디오의 내부는 전파 수신부와 증폭 부, 스피커유닛으로 이루어진 기본 구조 위에 수많은 부속이 부착되어 있다. 나는 그 부품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려고 했고 그림을 완성했을 즈음에는 각 부속들의 위치와 형태를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라디오에 관한 어떤 것을 알게 되었거나 드러낸 것은 아니다. 단지 사물로서의 라디오가 그림의 라디오가 된 것이다.
사물의 내부는 흥미롭기도 하지만 견디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사물이나 생명체의 외관이 아름다움을 지향한다면, 그 내부는 그것을 지탱하기 위한 형식으로서 아름다움과는 무관하며 한편으로 무자비할 정도로 솔직하다. 오래된 라디오의 외형이 과거의 시간, 유형, 낡음, 추억 등을 상기시킨다면, 내부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사물의 죽음의 상태를 보여준다. 그것을 그리는 일은 최대한 건조한 시선으로 그린다 해도 수많은 은유들을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작품 이미지

정재호, 타일, 창문, 2024, 한지에 아크릴 채색, 82.5x57cm

정재호, 충정아파트, 2024, 한지에 아크릴채색, 113x73.5cm

정재호, 붉은 사막, 2023, 한지에 유채 153,5x144.5cm

정재호, 새, 무게, 꽃, 2024, 한지에 아크릴 채색, 72x53cm

정재호, 무언가, 2024, 한지에 아크릴 채색, 71x53cm

정재호, 죽음의 형식, 2024, 한지에 아크릴 채색, 71.5x53cm